한사람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댓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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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 15시39분 한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번호는 “+82-2-2098-5874”, 일본에 거주하는 나의 개인 휴대폰에 한국으로부터 국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갑작스럽게 걸려온 국제 전화.

갑작스럽게 걸려온 국제 전화.

나의 일본 휴대폰 번호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명함을 받은 업계 관계자와 부모님 정도밖에 모르는 번호다. 당연히 업계 관계자들은 전화보다는 메신저나 보이스톡을 사용하지 돈 아깝게 국제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부모님의 경우도 얼마 전에 페이스타임 전용의 아이패드 미니를 사드렸고, 평상시에는 카카오톡으로 연락하기 때문에 국제 전화가 걸려 올 일은 없다. 그러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화 번호로 한국에서 국제 전화가 걸려온 것이라, 매우 급한 안건이지 않을까 하여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재외국민 대상으로 선거 의식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보내드린 이메일은 확인해 보셨는지요?”

황당했다. 보이스 피싱이라고 생각하여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일본 전화로는 보이스 피싱이나 텔레 마케팅 전화가 걸려 오지 않는다. 아이메시지나 스팸 메일은 많이 날아오지만 전화 번호가 유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연히 한국에서 유출된 것이라 생각하여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한국에 일본 전화번호를 제공한 곳은 얼마전 국회의원 선거 때 재외국민 선거를 하면서 제출한 것과, 은행 거래를 위해 얼마 전 해외 출국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것 말고는 없었다. 당연히 은행을 의심했고, 곧 바로 해당 전화번호로 스팸 전화 관련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눈을 의심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나 말고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같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베트남 등 다양한 지역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재외 국민 선거에 참여해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투표를 한 사람들이었다.
전화는 8월16일부터 걸려왔고, 현지와 시차를 맞추기 위해서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시간일 때 일부러 전화를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스 피싱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일 저녁에 영국에 사는 누군가가 집요하게 추적을 하여 이 전화가 정말로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가 실시하는 설문 조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사실은 후스넘버닷컴의 해당 번호 페이지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http://whosnumber.com/kr/0220985874)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선관위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한 재외 국민들의 인식 조사를 위해서 설문용 이메일을 발송하였고, 설문 조사에 참여해 줄 것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각 개인들에게 전화로 연락을 했다. 그런데 선관위는 이 의식 조사를 글로벌 리서치(http://www.globalri.co.kr)라는 여론조사 기관에 용역을 주었다. 그리고 이곳에 고용된 아르바이트 리서치 요원들이 재외 국민들을 대상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의 국민들에게 불쾌한 스팸 전화를 날리고 있었다.

전 세계의 국민들에게 불쾌한 스팸 전화를 날리고 있었다.

 

이름, 전화번호, 거주 국가, 이메일 등은 개인정보다.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해외 거주자의 현지 전화번호는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정보를 고스란히 민간 기업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사를 위탁 받은 민간 기업은 이러한 개인 정보를 충분한 책임 소재를 가릴 수 없는 아르바이트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다.
혹시나 해서 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재외 선거 신청서의 복사본, 선관위와 대사관에서 온 이메일 등을 찾아보았다. 개인 정보 제공에 대한 동의도 없고, 이것을 선거 의외의 목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설명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선관위는 아무런 동의도 없이 전세계 각국에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선거에 참여했던 재외 국민들의 개인 정보를 민간 기업에게 넘겨버렸다는 이야기다.

나를 더욱 짜증나게 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 선관위에 직접 물어보고 싶었으나, 민원을 넣기 위해서는 윈도우즈 PC에서 인터넷 익스플로어로 접속해 아이핀으로 인증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해외에 거주하고, IE도 윈도우즈도 사용하지 않는 나에게 매우 큰 벽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당황한 것은 윈도우즈를 띄워서 아이핀 인증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아이핀이 잠김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가 수많은 해킹 시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아이핀의 잠김을 풀려면 휴대폰 인증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해외 거주자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개인 정보 관리가 매우 민감한 국가에 오랫동안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이 매우 황당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의무를 다한 댓가가 이런 형태로 돌아오는데 강한 배신감도 느껴질 것이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개인 정보가 더 이상 유출되지 않도록 앞으로는 재외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다음 선거에도 참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까.

해외 거주자들을 더욱 더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해외에 오랜기간 거주하면서 큰 사건 사고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국가로부터 연락을 받아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 때도 제대로 공지조차 없었다. 일본에 10년을 살면서 영사관이나 대사관에서 우편물 한 번 온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전화는 이렇게 꼼꼼하게 하고 있다는데서 더 불쾌함을 느낀다.
내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아마 해당 기관의 수장과 담당자들이 모두 옷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그냥 선관위가 직접 이메일만 뿌려도 되는 사안이다. 여론 조사를 외부 업체에 위탁해야만 했다면 보다 안전하고 상식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가 생긴 가장 큰 이유는 선관위가 갖고 있는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 부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천만 명의 개인 정보를 유출시키고도 책임을 면제 받는 기업들, 보안에 투자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해킹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하면 믿어주는 국민들, 보안의 책임을 개인정보를 다루는 기업이나 기관이 아닌 각자의 개인들이 지게 하는 법 제도의 3중주가 이루어낸 해프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의식 있는 재외 국민들의 선거 참여를 막기 위한 정부의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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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ㅇㅇ
    응답

    익명으로 남기고갑니다. 저 리서치 회사 XX몬에서 시급 만원으로 야간시간대 21시~익일 5시로 저 알바 공고 냈던걸 봤었는데 저런 일을 하고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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